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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7. 17世 〉19. <부정공>승지공휘석부행장(承旨公諱碩溥行狀)
1. 문헌 목록 〉17. 17世 〉21. <부정공>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행숙천군호부사공휘진부묘표(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行肅川都護府使公諱鎭溥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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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부정공>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행숙천도호부사공휘진부가장(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行肅川都護府使公諱鎭溥家狀)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行肅川都護府使公諱鎭溥家狀 公諱鎭溥字鼎汝東山自號也其先淳昌人高麗檢校門下侍中諱璋爲鼻祖副正諱瑜號虔谷當鼎革之際以罔僕義不膺 本朝漢城判尹之徵盖自松京歸淳昌之梓鄕己數世至是又南遯于順天之富有縣朝家爲之表宅鄕人爲之立祠其長房孫有四昆季圭組之外又篤柳公權楊延壽家風名燕息亭曰相好爲南州矜式第三參禮察訪諱智崙第四 贈參判諱智崗參判生諱琛文科由翰苑躡玉署內止成均館大司成外止慶州府尹其後連世武仕曾祖諱爾重官統制使辛壬誣獄以平兵時銀子之說爲嚆矢追奪籍沒於身後 英廟乙巳與死事諸臣同伸雪復官大父諱꺉屢被鞫刑再謫邊郡而卒無嗣戊午與徐德修金聲節諸公同雪 贈左承旨皇考諱夢臣 贈戶曹參判以從子入系而本生諱泰鼎妣 贈貞夫人南陽洪氏宗殷之女又無嗣取察訪公后諱允命子子之即公也兩世覃恩以公貴推平澤林氏黙之女本生妣也 正廟癸卯正月二十三日生公于谷城曳山里第幼有異禀聰强過人甫成童略通經史家本在京禍釁後撤還鄕庄寥落蕭索殆近百年公自弱冠時慨然念前路振拔惟武爲近而况先業在是我其學射乎於是武藝成入南行宣薦當時世好諸公如李台憲球金台興根任大將聖皐白大將殷鎭尤器之交口稱賞且與趙豊恩家戚屬密邇常爲之東都主純王庚午式科其應講也大學三略對文義甚悉邀考官擊節丙子筮仕戊寅遷武兼宣傳官庚辰陞訓鍊主簿判官辛巳輔都總經歷參上宣傳官壬午增秩通訓以訓鍊副正通望授備邊郞時金公載瓚爲騎判怒一郎僚無文招諸郞試七步詩曰不能者盍去諸公輒對云各將一藝如相較燈下誰知自不明於是長官解頣甲申出守祥原郡介兩道八邑之交民俗輕於遷徏寧空宅而逃不欲式年立籍爲戶役煩重也是以閭落蕭然公至則先條便宜十餘事盖糾之以伍統導之以鄕約勸之以興學也且弊痼中可蠲减改革者與民約行而鷄柴之征飮射之資養士之需出俸金千鏹使之殖本以圖永遠由是流民稍稍還集馭屬吏嚴考 按次差役吏亦相戒絶干囑而無敢曠瘰爲治四載七考皆最秩滿將歸民旣臥轍不得則相與涕泣送之踰境者亦數百後勒石示不忘者凡十歲嘻莫强於人心而可以恩結可以誠感昔人之言信矣戊子移康津兵虞候翌年以繡褒晋通政階爲內禁將辛卯丁本生外憂憲王乙未起家爲長淵府使政如治祥纔日考與監司不相能課殿徑遞丁酉除咸鏡道訓戎僉使十五朔病遞間爲北漢山城管城將廣州中軍乃 哲王庚子辛丑也丙午特授肅川府使盖邑劇事煩可以試遊刃矣初政大行監司御使後先褒薦然忤其時柄宰宰欲傾之晙監司使貶黜而監司乃洪公在喆也考課之際不納其言間爲公說如此公聞而興喟曰年踰六旬吏終不可己乎將投劾自解設白場曰雲山從此別曰是日烹阿大夫齊國大治其試題也入京相識莫不爲公危之而柄宰亦敗自是念斷進取方其還鄕也趙台斗淳留之公愀然曰白首老吏志己決矣決而復進則不幾於患得者乎趙公爲之歛容盖服其廉靖也遂歸任實之渭南寓舍無何徏谷城之石谷樂其山水詩酒自娛竟不作終南一夢泰皇甲子以朝臣優老恩例晋嘉善授同知中樞府事兼五衛都摠府副摠管啣至丁卯二月一日考終春秋八十五以禮月葬于三岐面根村西麓坤阡公凡三配如例誥封皆爲貞夫人平山申氏進士益權女宜寧南氏士人道貫女礪山宋氏士人文載女是己一女宋出適全州李達秀副室南陽洪氏擧三男三女男秉龍南行部將因承重娶縣監成夏鎭女秉琥武科秉麟娶府使李龍求女全州柳善欽大邱徐善輔檢書金洛龍婿也秉龍男承烈繼烈女適延安金明淵孫曾男女若干人公志氣卓犖風儀秀爽稠廣中暎囂一座省內文武群僚推公爲第一流冲年出養考參判公喪耦己久又未幾見背後雖官榮祿厚慟不得以專城致一日養對盛饌輒逡巡不忍下箸奉祭必潔敬而所可效誠惟生庭在耳涖祥之初適値親졸晬陟岵望雲不足以自慰遂邀境內七旬父老讌餉甚盛羅巾鳩杖面面致情復以康營亞符歸覲大爲營辦請宗族故舊爲親供數日之歡每於所涖訪問一境有志行文學之士以禮饋之設功令課諸生必厚賞而爲之勸文風在在菀然自以蚤事弓馬不能究學公務稍閒遂對案看書故需時文辭滂沛無滯大易象數之蘊少素玩賾自得甚精攻詩對境成章以隨意之發而輸傾之爲快不抱抱事淘洗與金參判漢益沈進士斗永酬唱最多旣崛起門戶蹇滯之餘揣以常情若或抑心折節惟求售之汲汲而性本簡亢籧篨戚施所深恥乃不肯善事藩皐承奉權貴雖躓而不悔未及引年掛冠先退平日所養固如是有眞影與時文稿奉藏于家嗚呼距公之世今五十六年矣後承琑尾家傳無述耆舊之及見公時者凋謝殆盡楚相之談笑蔡郞之典刑無由復見其彷彿焉則異時杞宋之無徵亦次第事余小子爲是之懼敢欲撰綴事行而循環思惟第其通籍始終按誥書而可皦如治郡茂績據褒題而可犂然至若措心運意處事制行之在日用動靜者將何從以詳之也然一郡二府之惠愛昭著試問天下古今包豺虎之心而具鸞鳳之德者有乎必曰無矣無矣則公之平生行己巨細儘可驗矣謹書大略以侯立言君子 族孫 寅錫 謹述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행숙천도호부사공휘진부가장(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行肅川都護府使公諱鎭溥家狀) 공의 휘는 鎭溥요, 자는 鼎汝이며 東山은 自號이다. 그 선조는 순창인인데 부정공 휘 瑜의 후예다. 증조 휘 爾重은 벼슬이 통제사로 신임무옥(辛壬誣獄)때 평안병사 재임시의 은자(銀子)설에 의거하여 사후에 관작을 추탈당하고 가산을 籍沒당하엿다가 영조을사년(一七二五)에 그 사건으로 죽은 모든 선비와 더불어 함께 신원(伸冤)되어 벼슬이 복직되었다. 大夫 휘 꺉은 여러 번 극형을 당하고 두번 변방에 귀양살이 하다가 後嗣없이 졸하였는데 무오년에 徐德修, 金聲節, 諸公과 더불어 雪冤하고 좌승지 증직을 받았으며, 皇考 諱 몽신(夢臣)은 贈 户曹參判인데 從子로써 入系하였는데 生父는 本生 諱 泰鼎이고 비는 贈貞夫人 南陽洪氏 宗殷의 따님이었다. 또 후사가 없어 察訪公 휘 允命의 아들을 데려다가 아들을 삼으니 곧 공이다. 兩世가 은혜를 입은 것은 공의 영귀로써 推恩한 것이며 平澤林氏 默之의 따님은 本生妣이다. 정조 계묘년(一七八三) 정월 二十二일에 곡성(谷城) 曳山里 本第에서 출생한 공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기품이 있었고 범상한 아이보다 총명하고 굳세더니 겨우 成童이 되어 경전과 사기를 대략 통달하였다. 집이 본래 서울에 있었는데 화란이 난 뒤에 고향집으로 내려와 적막하고 공허하며 쓸쓸하게 지낸 것이 백년이 가까이 되었다. 공이 二十세 전후하여 울분강개하여 앞길을 개척하려 결심하고 오직 무(武)를 가까이하며 항차선업이 이에 있으니 내가 활쏘기를 배울진저 이에 무예가 이루어지매 남행선천(南行宣薦)에 들어가니 담시 세호(世好) 모든 공들인 이태헌구(李台憲球) 김태흥근(金台興根) 임대장성고(任大將聖臯) 백대장은진(白大將殷鎭)이 모두 공을 더욱 큰 그릇이라 입을 모아 칭상하고 또 조풍은가(趙豊恩家)와 더불어 척속으로 친밀하고 가까워 항상 동도의 주인이 되었다. 순조 경오년(一八一○)에 무과에 올라 그 응강(應講)할때 대학삼략(大學三略)의 문답이 심히 자상하니 시관이 탄복하였다. 병자(一八一六)년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가 무인(一八一八)년에 무(武)로 옮겨 선전관(宣傳官)을 겸하고 경신(一八二○)년에 훈련주부판관(訓練主簿判官)에 올랐으며 신사(一八二一)년에 도총경역참상선전관(都總經歷參上宣傳官)에 전직하였다가 임오(一八二二)년에 통훈(通訓)으로 증질(增秩)하여 훈련부정(訓練副正)으로써 통망(通望)되어 비변랑(備邊郎)을 제수받았다. 때에 김공재찬(金公載瓚)이 기판(騎判)이 되어 어떤 낭료가 문한이 없음을 성내어 모든 낭료를 불러 七步詩(일곱걸음 걸을 동안 詩를 다 짓게 하는 것)를 시험하며 가로되, 불능한 자는 어찌 내쫓지 아니하리도하니 공이 이에 대답하되 각 사람이 한가지 기술을 가지고 서로 비교하면 등잔밑이 스스로 밝지 못함을 누가 알리요 하여 이에 장관이 성을 가라 앉혔다. 갑신(一八二四)년에 상원군(祥原郡)에 출수(出守)하니 군이 양도八읍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백성의 풍속이 이사를 가볍게 하기도하며 아주 집을 비우고 도망하며 일정한 해에 입적을 하고저 아니 한 것은 호역(户役)이 과중한 때문이라. 이로 인하여 이문과 촌락이 한산하였다. 공이 부임한 초기에 먼저 십여가지 편리한 조목을 만들었으니 대개 五통으로 규합하여 향약(鄕約)으로써 지도하고 흥학(興學)으로써 권면한 것이며 또 고질적인 폐단가운데 가히 제감하고 개혁할 것은 백성과 더불어 약속하고 행하였으며 관문을 열고 천제 지낼 때 땔나무를 싸는 시단(柴壇)을 만들 비용으로 거둔 세금과 향음사어(鄕飲射御)의 자금이며 선비를 먹일 음식값으로 봉급중에서 돈 千꿰미를 내어 영원한 계획을 세우니 이로부터 유랑하던 백성이 점차 모여들었다. 아전을 부리면서 노역고찰을 엄히 하며 차역을 차례로 안찰하니 아전이 또 서로 경계하고 간여와 촉탁을 끊고 감히 오래 비우지 못하였다. 四년동안 재임하면서 七회 고적(考績)에 다 일등하였고 임기가 다되어 장차 돌아가려 하자 백성들이 길을 막다가 할 수 없으니 서로 체읍하고 지경밖에까지 송별한 자 수백명이요 돌을 세워 잊지 못한다는 뜻을 새겨둔 곳이 수없이 많았다. 아! 매우 강한 사람의 마음을 가히 은혜로써 맺고 가히 지성으로써 감동시키니 옛 사람의 말을 믿겠도다. 무자(一八二八)년에 강진병우후(康津兵虞侯)로 옮겨 다음해에 어사 천포로 통정계질에 올라 내금장(内禁將)이 되고 신묘(一八三一)년에 본생 부친상을 당하였으며 헌종 을미(一八三五)년에 장연복사(長淵府使)가 되어 치정을 일신하였으나 겨우 한번 고적에 감사와 사이가 나빠 과전(課殿)에서 곧 체직되었다. 정유(一八三七)년에 함경도훈융첨사(咸鏡道訓戎僉使)가 되어 십오개월만에 병으로 체임하고 사이에 북한산성관성장광주중군(北漢山城管城將廣州中軍)이 되었으니 이때가 철종경자신축(哲宗庚子辛丑)년이었다. 병오년에 특별히 숙천부사(肅川府使)를 제수하였으니 대개 읍이 까다롭고 일이 많으므로 가히 써 실력을 시험함이로다. 부임초에 선치하여 어사와 감사가 선후로 포양을 천거하였으나 그때 재상의 뜻을 어기어 재상이 꺾고자 감사로 하여금 폄출(貶黜)을 사주하였으나 감사는 홍공재철(洪公在喆)이라 고과 할 즈음에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간간히 공을 위하여 좋은 말을 전하니 공이 듣고 감탄하여 가로되, 六十이 넘는 노부가 벼슬을 이제 그만 두어야겠다하고 탄핵을 던져 스스로 해명하여 백일장을 개설하여 흰구름과 푸른산을 쫓아 이별한다 하였다. 이날에 아대부를 삶으면 제나라가 크게 다스려질 것이다. (是日烹阿大夫齋國大治)하는 것이 그 시제(試題)였다. 서울에 이르니 서로 아는 사람이 공이 위태롭다 하였으나 재상이 또한 패하였다. 이로부터 진취할 생각을 버리고 바야흐로 고향에 돌아오려할 때 조상두순(趙相斗淳)이 만류하니 공이 안색을 바로하여 가로되, 백수로이(白首老吏)가 뜻을 이미 결정하였으니 결정하고 다시 진취하면 얼마 못되어 근심을 얻을 것이 아닌가 하였다. 조공이 얼굴을 바로하며 대개 그 청렴하고 안정함을 감복함이었다. 마침내 임실 위남우사(渭南寓舍)에 돌아왔다가 얼마후에 곡성 석곡으로 옮겨 그 산수를 좋아하고 시와 술로 스스로 벗을 삼아 끝내 종남일몽(終南一夢)을 꾸미지 아니하였다. 태황갑자(太皇甲子)년에 조신우노은예(朝臣優老恩例)로써 가선(嘉善)에 증질(增秩)되어 동지중추부사겸 五위도총부부총관직함을 제수받고 정묘(丁卯)년 二월 一일에 춘추 八十五세로 고종(考終)하니 예제에 따라 삼기면 근촌 서록 곤천(三岐面根村西麓坤阡)에 안장하였다. 공의 三배는 등록에 따라 다 정부인에 봉하였는데 평산신씨 진사 익권의 녀(平山申氏進士益權之女), 의령남씨 사인도관의 녀(宜寧南氏士人道貫之女), 여산송씨 사인 문재의 녀(礪山宋氏士人文載之女)였다. 송씨는 한 딸을 낳았는데 전주 이달수(全州李達秀)에게 출가하였고 부실 남양홍씨(副室南陽洪氏)가 三남 三녀를 두었는데 남(男)은 병룡(秉龍)은 남행부장(南行部將)으로 인하여 승적(承嫡)하고 현감 성하진(縣監成夏鎭)의 녀를 취(娶)하였으며 병호(秉琥)는 무과(武科)요 병린(秉麟)은 부사 이용구(府使李龍求)의 따님을 취하였고 전주 유선흠(全州柳善欽) 대구 서선보(大邱徐善輔) 검서 김락룡(檢書金洛龍)이 그 사위였다. 병룡(秉龍)의 남(男)은 승렬(承烈) 계열(繼烈)이요, 녀는 연안 김명연(延安金明淵)이며 손증남녀 약간인이 있었다. 공의 뜻과 기질이 높고 뛰어나며 풍도와 의표가 빼어나고 시원하여 여러 사람이 모인 가운데서는 온 좌석을 위압하니 일향문무(一鄕文武)가 공을 일류(一流)로 추대하였다. 어린나이에 출양하였는데 고참판공(考參判公)이 상배(喪配)한 지 이미 오래고 또 얼마 안 있어 참판공이 별세하신지라 뒤에 비록 벼슬이 영위하고 록봉이 두터워도 전성(專城)으로써 하루 봉양을 이루지 못한 것을 슬퍼하여 성찬을 대하여도 매양 머뭇거리며 차마 수저를 대지 못하며 제사에는 반드시 정결히 하여 경건히 치성하고 오직 생정이 계시므로 상원(祥原)도 임초에 마침 어버이 생신을 당하여 산에 올라 구름을 바라보며 스스로 위로하였으나 이로써 만족치 못하여 마침내 경내에 七순부로를 청하여 성대하게 연향을 베풀고 비단두건과 비둘기를 그린 주령으로 낱낱히 정을 표하고 다시 강영아부(康營亞符)로써 근친(覲親)하니 사람이 준비하여 종족과 고구를 청하여 어버이를 위하여 수일의 즐거움을 공봉하였다. 매양 도임하면 온 경내의 지행과 문학이 있는 선비를 방문하여 예로써 대접하고 공령을 베풀며 제생을 고과할 때 반드시 후상하고 권면하니 문풍이 울연하였다. 스스로 써 일찍 궁마를 일삼고 학문을 못하였으므로 공무가 조금 한가하면 책상을 대하여 학문을 연구하니 당세에 응용할 문사가 막힐 것이 없고 대역상수(大易象數)의 이치를 젊어서 본래 완색하여 자득이 심히 정밀하며 시를 지을때 경지를 대하면 문장을 이루어서 뜻을 따라 발휘하고 수경이 명쾌하고 일에 얾매여 도세하지 아니하였다. 참판 김한익(參判金漢益) 진사 심두영(進士沈斗永)과 더불어 수창(酬唱)한 것이 가장 많고 이미 급히 급히 일어선 문호가 건체할 것을 헤아려 상정으로써 만일 마음을 누르고 절도를 꺽어 본디 간결하고 고상하여 아첨하고 멸시한 것을 수치로 알고 이에 안찰사를 잘 섬기고 권귀를 능봉하는 일과 같은 것은 하지 아니하여 비록 넘어져도 후회하지 아니하고 치사(致仕)할 노년(老年)에 미치지 못하고 사직하고 먼저 물러나니 평일에 닦은 바가 진실로 이와 같았다. 진영(眞影:초상화)과 시문의 초고가 집에 보관되어 있다. 아, 슬프다. 공이 가신지가 이제 五十六년이라. 후손이 잔약하고 기술한 가전이 없으며 옛 늙은이의 공의 시대를 참관한 자가 자못 다 영락되어 초상(楚相)의 담소와 채랑(蔡郞)의 전형을 다시 방불케 함을 볼 수가 없으니 훗날 기송(杞宋)의 증거 없음과 같은 경우가 지금 일이니 소자가 이를 걱정하여 감히 사행을 주워모아 글을 쓰고저 차제로 생각하니 그 통적시종(通籍始終)은 교서를 살펴 명료하고 치군무적(治郡茂績)은 포제(褒題)에 의거하여 가히 알겠으나 마음을 가지고 뜻을 전하여 일용 동정에 있는 처사 제행은 장차 어디로 쫓아 자세히 알 것인가. 그러나 一군 二부의 은혜로히 사랑한 것이 밝게 나타났으니 천하 고금에 물으면 시호(豺虎)의 마음을 가지고 난봉(鸞鳳)의 덕을 갖춘자 있다 할 것인가 아니다. 반드시 없다고 말할 것이다. 없다고 하면 공의 평생에 크고 적은 행기는 다 가히 증험하였도다. 삼가 대략 기록하여 써 임언군자(立言君子)를 기다리노라. 족손(族孫) 인석(寅錄) 삼가 기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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